Re-Dating the Gospels
Re-Dating the Gospels
(The Four: A Survey of the Gospels, Peter J. Leithart, 105-108.)
John Wenham은 최근에 공관복음이 A.D. 4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태복음이 최초로 기록되었는데 대략 40년경, 마가복음은 45년경, 누가복음은 54년경에 그리고 사도행전은 대략 62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초기 연대를 결정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복음서들이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서에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들이 그 사실 이후에 예수의 말로 삽입되었다고 주장한다. 마태는 예루살렘이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너무나 정확하게 기록했다. 이 주장은 복음서들이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가정하며 또한 예수의 예언들이 구체적으로 A.D. 70년에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느브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묘사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이라고 무시한다. 우리는 사실 이후에 묘사가 훨씬 더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가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에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선생을 방어하기 위해 그 사건으로 언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종종 언급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일까?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아직 예루살렘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Wenham은 전체 신약성경은 성전의 멸망 이전에 다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Wenham은 더 구체적인 시도를 사도행전으로 시작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전도여행에 관한 모든 부분은 로마를 향한다. 바울의 이야기는 가이샤 앞에서 바울의 재판의 절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은 아니다. Wenham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마무리할 때에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바울의 재판과 죽음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분별있게 주장한다. 그는 또한 누가가 60년대 중반에 시작된 유대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사도행전 기록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에는 로마와 유대의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면에, 사도행전 전체에서 교회와 로마의 관계는 아직은 좋다. 사도행전에는 60년대 중반 네로의 통치 기간에 박해에 대한 단서가 없다. 70년 이후에 지배권을 상실한 사두개인들이 사도행전에는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최종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였던 야고보는 62년 경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상에 모든 것들을 통해 사도행전이 62년 경에 완성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역으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이전에 기록되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자신의 이런 작업, 그의 복음서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사도행전 보다 얼마나 일찍 기록했을까? 고린도후서 8장 18절이 도움이 된다. 바울은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은 자요"라고 언급하는데 초대교회의 전통은 바울이 누가에 관해 말한 것이라고 본다. 누가는 어떻게 "복음으로써 칭찬을 받"았을까? 아마도 누가는 그가 기록한 볻음서로 인해서 모든 교회에 잘 알려졌을 것이다. 바울은 누가의 명성이 모든 교회들에 있다고 하는데 바울이 설교에서 언급했을 가능성은 없다. 반면에 책은 누가의 명성을 모든 교회들에 확산시킬 수 있다. 바울은 56년 경에 마케도니아에 있을 때 고린도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56년 이전에 기록되어야 하고, 책이 모든 교회들에 순환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훨씬 이전에 기록되어야ㅑ 한다. Wenham은 누가복음은 대략 54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결론내린다.
교회의 전통은 마가와 베드로는 42년에서 44년까지 로마에서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참조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마가복음은 44년에서 50년대 초반까지 언제든지 기록될 수 있었다. Wenham은 마태복음이 마가복음보다 먼저,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을 인용하며 마태복음의 연대를 40년대 초반으로 주장한다. 한 초기 증인은 심지어 마태복음이 오순절 직훈, 스데반의 순교에 이어진 박해의 기간에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Wenham의 주장은 강력한데, 그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그가 대부분 옳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들이 Wenham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일찍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30년대에 기록하지 못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책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기록되었고 이 기록된 기사들은 이스라엘 전체 국가적 삶의 기본이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건 이후에 곧장 기록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창세기와 율법의 책들은 성경으로 편찬되었고, 여호수아도 곧 추가되었다. 아마도 왕정 시대 초기에 누군가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에 다윗 왕가의 설립을 기록했다. 열왕기 상하는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기록되었고, 역대기는 포로에서 귀환 얼마 후에 기록되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지금 이루어졌는데 유대인들이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을 수십년 미루기로 결정했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이 모든 기록을 뒤로 미루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대부분 신약성경 구절은 신약성경 기록들이 매우 이른 시기에 이미 성경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변형을 통해 확인된다. 그는 예수의 변형은 "예언의 말씀"으로 확정하고, 성경은 그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주장은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 없다면 예언으로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가 예언의 말씀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예수의 권능과 재림"의 예언이다(마 16:27-8). 이것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그는 반드시 복음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마지막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와 "다른 성경에 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는데(3:16), 여기에서 바울(의 편지)는 그 시대에 성경으로 간주되었다.
다른 예는 디모데전서 5장 18절에 나타난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문장은 몇몇 구약성경에 배경을 둔다(레 19:13; 신 24:15)). 그러나 이 구절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10장 10절과 누가복음 110 7절은 매우 일치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서에서 인용했고, 목회서신을 기록할 때에, 그것을 성경에 일렀으되 라고 인용한다. 디모데후서 3장 116-17절 역시 관련되어 있다. 이 잘 알려진 구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인 것을 계속해서 촉구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강력한 진술이다. 이 구절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신약성경을 알았음을 으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바울이 50년대 혹은 60년대 초반에 기록하고 있었다면, 디모데가 당시 30(청년)으로, 그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직후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매우 이른 시기에,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는 기록들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 논쟁에 관한 상세한 특성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복음서에 대한 현대의 관점에 합리적인 대안을 지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