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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도서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제목이 참 독특했다. 매일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을 검색하고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다가 월말쯤에 책을 산다. 한 달에 한 번 일정 비용의 책을 사는 것이 결혼 후에 습관이다. 그런데 책이라는 것이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나오지 않는다. 위시리스트에는 수십 권에 책이 담겨 있고, 살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매일 고민한다. 어떤 책이 최고의 선택일까?

전혀 모르는 저자, 신학적인 전통도 조금은 다른 침례교.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엔 샀다. 처음에는 너무 재밌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시각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교회의 신학, 면죄부와 같은 잘못된 신학을 저자는 아르뱅주의라고 명명한다. 그 아르뱅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의 혼합어이다. 이미 이런 혼합어는 칼미니즘이라고 마이클 호튼 같은 사람들이 말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신학, 특별히 구원론에 대해서 아르뱅주의라고 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더 가까운 한국교회의 구원관과 거기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칼빈주의(사실 난 칼빈주의라는 말을 싫어한다, 아니 모든 ‘주의’를 싫어한다)라는 저자의 확신을 반영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기가 왔다. 아르뱅주의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별히 칼뱅주의에 대한 저자의 이해에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칼뱅주의, 아니 내가 아는 개혁신앙을 너무 오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자의 오해는 오해가 아닌 한국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교회의 가르침과 교인들의 삶이 가져온 오해일 것이다. 저자가 한국에서 말하는 칼빈주의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신앙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 없이 접근한다면 더 좋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를 하는 것이라면 나라도 미안하다고, 잘하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그럴 자격도 위치도 대표성도 없지만. 그러나 그 오해가 단순히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칼빈주의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면죄부인 아르뱅주의를 세 가지 우물을 통해서 말한다. 그리스 철학, 그냥 헬라 철학이라고 하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우물, 루터의 우물. 각각의 우물들이 제공하는 생수가 지금은 물구덩이가 되어 한국교회의 함정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잘못된 신학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잘못된 가르침이 잘못된 확신으로, 잘못된 확신이 잘못된 삶으로 나타난다. 이런 총체적인 문제가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잘못된 신학, 그 가운데 잘못된 구원관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나누어주고, 확신을 준다. 그래서 성화된 삶을, 성화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가장 크게 동의하는 부분은 구원을 개인적인 것이 아닌 교회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 구원은 단순히 구원파와 복음주의가 말하는 개인 차원의 구원과 천국행 티켓이 아니다. 전인적인 성화의 삶이며, 그 성화의 삶은 교회를 통한 삶이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도덕적 인간(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는 어쩌면 한국교회에 잘못된 구원관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구원관이 성경적이며, 교회론적인 구원관으로 회복된다면 니버의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부디 한국교회에 그런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혁신앙에 대한 오해, 아니 극단적인 개혁신앙의 모습이 아닌 삶과 이론이 균형 잡힌 개혁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어 저자의 오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대안 ‘제3의 길’이 이미 개혁신앙의 참된 삶과 가르침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와 한국교회가 되면 좋겠다. 

개혁신앙에 대한 이해 부분을 견딜 수 있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으면 좋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이해와 그 이해를 따른 선한 삶(마 5:16)이다.